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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대담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 뉴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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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일반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대담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2017년 07월 12일

본문

사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CTK)

 


본교 전광식총장은 미국에서 간행되는 세계적인 기독교 월간지로서 한국판으로 나오는 Christianity Today(크리스채너티 투데이) 7월호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장로회신학대학 총장과 현대문명전반에 대한 대담을 하여 그 전문을 수록한다.

THE REFORMATION AT 500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담 전광식 고신대학교 총장, 임성빈 장신대학교 총장 | 진행 김은홍 편집인 | 사진 김승범

 

 

한국을 대표하는 두 신학교의 신학자이자 총장이신 두 분은 또한 문화와 문명에 대해서도 깊은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의 시대와 현대 문명이 어떠한지, 그 큰 그림을 그려주시기 바랍니다.

 
전광식: 문명의 그림을 크게 그려서 설명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20세기와 21세기가 걸친 이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일 겁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가 〈루이 14세 시대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글에 보면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네 번의 황금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페리클레스 시절의 민주정이 꽃을 발했던 고대 헬라, 로마의 공화정 시대,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루이 14세 시대라고 말하면서, 앞선 세 번의 시대보다 루이 14세 시대가 프랑스의 살롱문화를 중심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번영을 구가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실 볼테르가 오늘을 살았다면 과거의 네 시기가 아무리 찬란한 문명이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훨씬 더 찬란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이기도 한 것이 아니라, 또한 문명의 위기가 보이는 암흑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현대 문명을 야누스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산업과학기술 문명이 정점에 달한 시대이지만, 우리가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바라 볼 때는, 환경 파괴나 비인간화를 떠나서라도, 문명의 어두운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두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에 비유한다면, 20세기 문명은 한편으로는 진보의 밝은 측면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금 말씀드린 여러 가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위기현상과 더불어 위기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타고 가는 21세기 문명은 문명화와 야만화의 선로를 달리고 있는 역사의 기차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성빈: 저는 현대 문명을 이해하는 데는 몇 가지 축, 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에 가장 도움을 받은 것은, 문명의 발전을 연속성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세계화’의 관점입니다.
오늘날 세계화의 가속화는 세계의 유일한 보편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을 실현 시켜 줄 수 있는 과학의 발달이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낸 결과라고 봅니다. 또 오늘날의 세계화 현상이 지난 세기에 진행되어왔던 다양한 세계화현상과 차별되는 점은 과학기술의 발달, 그 중에서도 특별히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상당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에는 인공지능AI 기술과 같은 4차 산업혁명으로까지 연결되고 있어서, 우리가 현대 문명을 이야기할 때 현대에 진행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해서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신학을 하는 사람들, 신앙인들은 인간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복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교회 안에서 만의 개혁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개혁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의 발달과 문명사회 전환이 상당히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우리는, 미시적으로 교회 안에서 바꾸어야 할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개혁의 세계사적이고 문명사적인 의미를 같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포착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관점 중의 하나가 세계화의 관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편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던 문화로의 전이, 여전히 전근대와 포스트모던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지만 그러나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문화의 득세라고 할까요,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더 예민하게 포착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현대 문명을 논할 때 과학의 변화와, 과학의 변화가 가져오는 삶의 정황의 변화에 따른 문화의 변동, 그리고 과학과 문화의 변동에 따른 사회 변동이라는 복합적인 현대문명 양상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오늘의 문화를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포스트모던 문화가 근대적인 주체와 전근대적인 주체에 대한 의심과 그런 인위적인 권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흔들어 놓은 것은 한편으로 공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는 주체성의 기반을 너무 흔들어 놓으니까 현대인들이 비판성은 뛰어나지만 결국은 자기 주체에 대한 것은 찾지 못해 흔들리는 자기 주체성을 소비문화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 현대자본주의의 소비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오늘날 문화를 추동하는 힘은 자본주의 소비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사회문화 곳곳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여기서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세계화, 디지털화로 상징되는 과학과 커뮤니케이션의 변화, 포스트모던 문화와 소비문화가 현대 문화를 복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한 현대 교회에도, 신앙인들에게도 상당히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전광식: 임 총장님께서 현대 문명과 현대 문화의 중요한 키워드를 다 말씀하셨습니다. 세계화라든지, 인간주체의 문제라든지, 과학이라든지, 컴퓨터라든지, 소비라든지, 이것들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상세한 부분들을 말씀해 주셨는데, 말씀에서 두 가지 핵심을 잡는다면, 세계화와 인간의 주체화는 모더니즘적인 측면을 말씀하신 것인데, 거기에서 부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면서 주체의 위기를 암시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우리가 문명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가 중요한데, 문명화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근대화인데, 이 근대화를 향해 인류가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근대화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우리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종교개혁과 같이 일어난 르네상스 계몽운동을 통해서 중세의 아욱토리타스auctoritas, 권위적인 시대를 극복하고 근대의 인간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와 시금석으로 등장하면서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근대의 경험적 이성으로 과학이 등장하고, 과학의 원리를 응용하다 보니까 기술화로 이어지고, 기술을 사용하여 물건을 생산하고 생활에 필요한 걸 만들다 보니까 산업화가 진행이 되었고, 산업체와 거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모여사니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도시라는 게 어떻게 말하면 “뜨내기들의 집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고향 떠나서 모여든 사람들이 여기서 좋은 삶, 출세, 성공을 추구하다 보니까, 즉 도시가 욕망을 지닌 집단이 되다보니 고향에서 느꼈던 상호소통은 전혀 되지 않고 인간 소외 현상, 물화 현상이 빚어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돌파구를 찾고 삶의 위로거리를 찾게 되다보니 문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화→과학화→기술화→산업화→도시화→문화화의 과정으로 내려오면서 현대 문명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과정 전체를 보면, 주체로서의 인간이 역사의 축이 되어 온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20세기에 와서 가장 큰 문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인간의 위기입니다. 기독교 철학자 헤르만 도예벨트 같은 사람이 그렇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에리히 프롬 같은 사람도 19세기 인류 사상의 키워드는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도 하나님의 죽음을 이야기했고, 다윈도 창조자의 부재를 이야기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스승인 포이에르 바흐도 신은 허상이라고 주창했습니다. 이처럼 19세기의 키워드가 ‘하나님의 죽음’이라면, 20세기의 키워드는 ‘인간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문명화가 이뤄지고 세계화가 되었으면 인간의 능력과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의외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반성해 보니까 문명 이면에 인간의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고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는데 하나님의 역사 개입 같은 것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중심이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가고, 하나님이 만든 것보다는 인간 자신이 만든 것으로 무엇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청지기가 아니라 지배자요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보니 인간의 승리가 아닌 인간 위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봅시다. 세계대전, 인간대량학살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훼손에 이르는 환경오염, 인간소외현상까지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인간이 잘 사는 것을 추구했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면서 존재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전반적으로 문명은 인간 주체를 외쳐왔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 시대 문명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위기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과학기술이 원자폭탄 같은 대량학살무기로 인간을 대량 살상하는 단계였다면, 이제는 인간 자체를 개조하려는 초기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바로 여기에 말 그대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 CT의 이번호 커버스토리 주제가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는 “로봇이 당신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입니다.


임성빈: 최근의 담론들에 두 가지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 같은 분들이 요즘 뇌 과학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매우 우울해집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착각이고 환상이다.” 이러한 비관적 관점은 결국 인간이 노예화될 것 같은 위기감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반대편에 있는 분들은 매우 대조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도구이지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이것은 굉장히 낙관적인 전망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그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칫 너무 비관적인 관점에 치우치면 현재 상황에 대한 개선의지가 약한 묵시론자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을 어린 시절 참석한 부흥회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너무 과하게 겁을 먹고 종말론적인 묵시적 겁박을 당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던 경희대 이경전 교수의 조언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은 사실부합성이 좀 의심이 됩니다.

저는 세계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스 큉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찬성하고 반대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오는 현상들이다. 이것을 아주 악마화 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사실 부합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이것은 규제되어야 되고 인간이 개입해야 된다.” 문명의 변화, 문화의 전환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에 있어서 한스 큉의 이 입장이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주체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인간은 그렇게 많을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양극화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더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 때 과학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본분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훨씬 더 신앙적인 인간관, 특별히 청지기 의식의 강화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8:2보다 9:1로 더 심화될 양극화가 도처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면, 능력 있는 이들이 그것을 자기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를 극복하고, 전체 우주와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는 정도의 안목과 비전을 가진 신앙인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광식: 원래 인간이 학문을 시작한 것이 특이한 자연현상에 대한 놀람(thaumazein)이었습니다. 왜 갑자기 산이 불을 쏟아 내는지, 왜 갑자기 땅이 입을 벌리는지, 왜 갑자기 바닷물이 육지로 올라와 마을을 쓸어 가는지 의문이었습니다. 화산이나 지진이나 해일 같은 이런 특이한 현상들에 놀라면서 그 원인에 대한 지성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면서 학문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시대도 인간은 과학기술에 대해 놀라고 그 위력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그 지성이 유아기 때에도 놀랐지만 계몽이 되어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놀라는 것을 보면, 인간은 정말 피조물이지 창조주가 아님을 체감합니다.
자연현상을 봐도 놀라고 과학현상을 봐도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창조는 어떻게 된 것인지, 기독교 과학자들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놀라고 있습니다. 사실 21세기에 들어오기 전에, 1960, 70년대에 첨단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 과학자들이 21세기에는 과학기술이 다 먹여줄 것이므로 인류는 일하지 않고 쉴 것이라며 허풍을 떨었습니다. ‘테크노피아로 갈 것이다!’ 라고. 그런데 21세기가 된 지 십 수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대학생들은 졸업을 해도 직장 구하기도 어렵고, 과학기술이 다 먹여주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생계조차 고민해야 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과학기술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는 환상의 마술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예찬자 또는 선지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분들이 자제해야 합니다.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과학기술은 결국 인간이 만든 일종의 기술적인 장치이고 메커니즘입니다. 인공지능을 말하고들 있지만, 그것에 정서나 창조력이나 기본적인 인격의 통전적인 성격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신공지능”, 저의 표현입니다만, 이 “신공지능”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창조력의 근원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간과하면서 ‘기술이 대단하다더라’ ‘알파고가 누구를 이겼다더라’ 이런 것만 강조합니다. 과학 환원주의, 기술 환원주의에는 빠져서는 안 됩니다, 과학이 제일이고 전능이고, 이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고, 이것이 우리의 일자리까지 해결해 줄 수 있고 먹이고 살릴 것처럼 생각하는 과학 환원주의나 과학이 줄 수 있는 미래에 대해 너무 낙관할 필요는 없겠다 싶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중국 사람들은 과학의 힘으로 로켓을 타고 달나라에 가는 것이 꿈이랍니다. 중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발달된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주여행도 하고 달나라, 별나라에까지 갔다 온다고 해서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곳에 가서도 인간이 왜 사는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를 모른다면 앙상한 먼지 외에 발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공부를 하다가 영국 옥스퍼드로 옮겨 공부를 했습니다. 옥스퍼드 중앙도서관 천정에 “주는 나의 빛”, ‘도미누스 일루미나치오 메아dominus illuminatio mea’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글이 왜 천정에 적혀있을까? 그 도서관 천정 아래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젊은이들인데, 아무리 물리의 세계나 생물의 세계를 파고들어도 그것이 우리 지성이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아는 것이지 그것을 벗어난 것들,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의 삶의 이유는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인가?’ ‘천지만물은 왜 존재하는가? 그것의 존재하는 뜻은 무엇인가?’ ‘시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답은 스티븐 호킹도 아인슈타인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를 하다가 피곤해서 기지개를 펴고 고개를 들면 “주는 나의 빛”을 보게 되는 겁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타락으로 인해서 어두워진 우리의 지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성을 따라가며 창조의 오묘함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 인간의 존재, 역사의 의미, 내세의 문제, 신의 존재와 같은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그야말로 까마득한 지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학의 표지처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타락으로 인해 어두워진 우리의 지성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셔야, 그때 비로소 인간은 이런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도 아니고 정서가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가진 인격의 통전성이 있는 것도 아닌 근원적인 한계성을 지닌 이 과학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를 저는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과학과 과학기술, 그리고 과학의 한계에 대한 정확하고도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는 과학을 윤리적으로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과학기술도 인간이 만든 것이니 통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과학은 정확한 인식과 선용하는 것, 통제가능한 정도의 수준에서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성빈: 전 총장님 말씀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면서, 이런 강조점의 차이는 가질 수 있겠습니다. 분명하게 신학적으로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다 상대적이요 역사적인 것입니다. 궁극적인ultimate 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 이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무, 청지기로서의 기본적인 책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과학이 주도하는 삶의 정황의 변화들, 이것이 결국은 문화의 변동 아니겠습니까? 사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가면서 전근대에서 근대 문화가 형성되고, 또 그 이후에 이성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 상황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이 너무나 엄청납니다. 제가 과학에 대해 잘 몰라서 동경의 이미지가 강한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의 과학 기술문화, 우리가 밟고 있는 삶의 정황이 우리의 생각, 감성, 가치판단, 즉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전 총장님이 말씀 하신 대로, 저는 교회가 과학에 대해서 조금 더 진지하게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여기에 대해 더욱 진지한 대화를 할 필요가 있고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윤리적 판단을 해버리고 신앙과 이성을 이분법화 하여 대치시키는 반지성적 신앙으로 너무나도 쉽게 나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과학과의 대화에 좀 더 신중하고 겸손하게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이 반지성주의, 반과학주의로 오독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 가깝지만, 우려를 하게 됩니다.


전광식: 임 총장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섣불리 이원론이라든지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과거 테르툴리아누스의 입장처럼 문화나 과학을 영적 관점에서 백안시하지 않습니다. 소위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입장에서 일부의 목회자들이 취하고 있는 반지성주의도 저는 상당히 경계합니다. 다만, 그런 지성적인 논의에 대한 것은 충분히 인정을 하더라도 과학기술에 대해 너무 과민하거나 겁먹을 필요도 없고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시 문화를 바라보든지 과학을 바라보든지 간에 저는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인간적인 긍정’(menschliches Ja)의 단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과학이 좋은 기술도 만들어내고 좋지요. 인간적으로 당연히 긍정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는 과학이 좋은 것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단계입니다. 과학이 기술과 산업으로 이어지다 보니 환경파괴도 초래합니다. 핵무기도 만듭니다. 결국에는 과학이 우리 일자리까지 빼앗아 가는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심지어 창조세계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과학에 대한 두 번째 단계, ‘인간적인 부정’(menschliches Nein)의 단계입니다.

이 두 단계에서 왔다 갔다 하면 안 되고 제3의 단계로 나아가야합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 안에서의 재긍정’(göttliches Ja)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교회 안에서 적용해 보면 우리가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구원도 얻고 행복해 보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술 먹고 방황하는데 교회에서는 찬양도 하고 천국도 소망하니까 교회를 긍정하게 됩니다. 긍정의 단계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교회 안에도 세상에 있는 온갖 문제점들이 보이고, 지도자들의 허물도 보이니 교회도 별 수 없는 세속적 집단이라며 부정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긍정과 부정을 왔다갔다 하다보면 결국 교회 비판론자가 되고 맙니다. 그 때 거기에서 한 단계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재긍정’ 단계입니다. 교회 안에, 목회자에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 연약함도 보이고 그러면서 교회가 본래적인 의미에서 충만한 삶이 있다고 생각하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재긍정으로 갈 때 과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탁월한 지성과 기술을 가지고 구축해 만든 것이요, 결국 하나의 문화명령의 과제를 이행해서 나온 열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삶과 문화에 주는 유익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저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그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신뢰, 이것이 마치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면 과학적 환원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므로, 과학이라는 우상 앞에서 우리가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명철하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임성빈: 제가 문화해석적 적용을 할 때 가장 도움 받는 말씀 중 하나가 디모데전서 4:4-5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창조신학적인 입장에서 과학을 포함한 문화적인 것들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적극적인 입장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물론 거기에 ‘죄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가한 것은 아니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딤전4:5) 결국 변혁의 과정을, 개인적으로는 성화의 과정이고 사회참여적인 과정에서는 변혁의 과정을 끊임없이 밟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과학과의 대화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하지만, 잘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패러다임이 다를 수 있고 전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학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신학적 전제가 있는 것이고 과학을 하는 사람은 과학적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무시하고 대화를 하는 것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닙니다. 대화는 전제가 다른 것들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너무 동일시하려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겸손해야 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없는데, 신학자들이 과학의 세계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바른 신학의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반면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과학 이론으로 성경을 재단하려고 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범한 또 하나의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서로에게 겸손과 경청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처한 삶의 정황에 따라서 패러다임이 다르고, 자기가 확신을 하는 것이 패러다임 안에서의 확신이기 때문에, 그 패러다임을 벗어나면 내가 알고 있던 사실에서 모순이 많이 발견됩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이러한 태도가 결여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더 겸손하게 경청하고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광식: 임 총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학자들이 과학자를 잘 모르면서 쉽게 단정해 버리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과학의 고유한 문제들, 이를테면 생물학이나 천문학의 문제라든지, 그밖에 여러 가지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답을 할 수 있겠지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서로의 패러다임이 다르므로 겸손하게 존중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쿤의 말처럼 학문적인 체계들 사이에 패러다임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을 치료할 때에 서양의학의 패러다임과 한의학의 패러다임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편도염이 생겼다고 하면 서양의학은 약 처방을 하든지 수술적 처방을 하든지 하는 반면 한의학은 침을 놓습니다. 인체를 보는 시각이 판이한 것입니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편도선을 치료해 건강을 회복시키겠다는 공통점이 그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다루는 고유의 구체적인 현상세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침묵할 수 있습니다. 제가 봐도, 잘 모르면서 신학자들이 단정만 해서 접근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볼 때에는 교만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나 신학이나 만나는 접점이 있는데, 그것이 궁극적 물음입니다. 궁극적인 물음 앞에서는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등의 문제에 봉착할 때 과학과 신학은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서로 부딪힐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기본적으로 진리를 말할 때는 겸손해야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진리에서는 담대해야 합니다. 뉴튼의 고백처럼 조가비로 바닷물을 조금 푸는 것 같이 존재의 극히 일부분을 알고 있는 과학이 우주 전체를 해석하려 하거나 궁극적인 질문에 답하려 하면서 성경의 진리에 도전하고 훼손하려 든다면 그 때 우리는 지혜로우면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에 대한 담대한 고수가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선하다는 성경 말씀에 공감합니다. 미국의 철학자 아서 홈즈Arthur F. Holmes가 “All truth is GOD’s Truth”라고 말했듯이, 세속의 과학자가 진리를 발견했든, 그리스도인이 발견했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궁극적인 질문에서는 서로 충돌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너무 선제적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것처럼 비췰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학자들이 예사로 작은 결론들을 가지고 궁극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성경과 다른 결론에 도달하니까 그런 면에 대해서 대담하게 하다 보니 그렇게 비춰질 수 있지 않은가 싶은데요. 그래도 어찌되었든 우리가 가진 진리를 전할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임성빈: 제가 볼 때 오로지 신앙적 관점에서만 과학을 판단하는 분들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시대의 과학을 주장하느냐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관심 있는 분들 중에는 과학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18, 19세기의 과학을 생각하면서 논의를 하시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윤리와 문화적인 현실을 보면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가치의 측면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이고도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담대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본질적 가치에 기독교가 목숨을 걸고 있느냐, 아니면 상당히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측면이라든지, 그런 본질적 가치가 아닌데도 거기에 기독교가 양극단에 서서 갈등 사회를 부추기는 측면은 없는지 하는 반성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광식: 한 가지만 더 첨언하자면, 우리가 지금 죄의 문제를 거론할 때, 일부 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죄로 간주하고 죄악시 해왔던 문제들을 다시 신학적으로 재해석해서 죄의 영역을 상당히 좁혀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로 보았던 것을 아닌 것으로 재해석 하더군요. 아디아포라를 말씀하셨는데, 이미 루터와 칼빈부터가 달랐습니다. 루터가 볼 때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예배 형식 같은 면에서 좀 더 많이 있는 것이고, 칼빈 같은 좀 더 다른 신학자들이 볼 때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더 좁았거든요. 아디아포라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임성빈: 저는 죄에 대해서는 훨씬 확대된 개념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윤리학에서도 라인홀드 니버가 “비도덕적 사회의 도덕적 인간”Moral Man in Immoral Society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적으로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랬다고 합니다. 누가 와서 당신이 쓴 것 중에 고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많다고 했답니다. 그중에 꼭 하나 고치라고 하면 무엇이겠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책 제목을 “The not so moral man in his Less Moral Communities”(별로 도덕적이지 않은 시대의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은 인간)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죄론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사실 죄가 아닌 게 없지요. 그런데 저는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더 붙들고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죄에 대해 매여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한복음 9:1-7 말씀을 보면 시각장애인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해석이 완전히 다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사회적인 문제나 개인적 문제, 죄의 문제로만 해석이 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물론 죄가 있기는 하지만 너희들이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그 사이에서 해결해야 될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가지고 정죄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야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제 우리 한국 기독교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있어서 복음에 대한 강조로써 그 균형을 갖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과학도 그 영역에 같이 있다고 봅니다.

 
전광식: 죄성에 대한 얘기를 했으니 한 말씀만 하면, 기본적으로 말씀하신대로 죄보다 은혜를 강조하는 것에는 다 동의합니다. 그게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에서나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볼 때 19세기 리츨주의자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죄의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성애를 강조하며 만인구원설로 흐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요성을 약화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얘기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측면에서 죄의 심각성과 은혜에 대한 성경적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요. 저도 사실 메시지를 전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먹보다 검을지라도 그 죄를 압도적으로 뒤덮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붉은 덮개가 복음이다”라고.

 
임성빈: 유럽이나 미국의 상황을 볼 때 특히 유럽 같은 경우에는 세속화가 워낙 강하니까 유럽 신학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다른 균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교회마다 전통이 다르기는 하지만, 제가 자란 전통만 해도 율법성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제 안에 복음의 자유함이 부족하기에 오히려 방법적으로 균형을 잡기 위해서 은혜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제 시선을 거대한 문명에서 우리의 문화로 옮겨보겠습니다. 문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의 현대 문화, 명동의 문화, 남포동의 문화, 부산지하철의 문화, 서울지하철의 문화, SNS의 문화, 광장의 문화…, 오늘 이 땅의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전광식: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문화현상적인 측면만이 아니라―이에 대해서는 임 총장님이 더 잘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것이고―항시 문화의 심층에 흐르고 있는 흐름이 무엇일까, 문화에 대한 영적인 조망이랄까, 이쪽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로서 시대의 심층을 꿰뚫고 보는 영적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멀리 다가오실 하나님의 왕국이라든지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던 에스겔, 다니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과는 달리, 자기 시대에 있던 다윗의 왕조에 대한 영적 진단을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망원경만 쓰는 게 아니라, 잠수경도 써야한다고 봅니다. 망원경은 멀리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초림,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 나라와 종말을 바라보지만, 잠수경은 이 시대의 저변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문화의 심층에 흐르고 있는 영적 기류는 어떠한가? 시대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기울고 쏟고 따라가고 있고, 삶이 흐르고 있는 그것에 대한 영적 시각을 놓치지 말자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임성빈: 사실 저는 공부할 때에 가장 큰 관심 중에 하나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관심이고 하나는 문화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싸우나?’ 그런 것들이 저는 참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신앙이 틀리고 맞고, 누구는 다 옳고 누구는 다 틀리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싸우는 경우가 꽤 많고 그 다름을 죄가 이용하는 것 같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한국 사람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과 한국 사람이 믿는 방식이 좀 다르더군요.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왜 다를까? 그와 나를 다르게 만든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문화적인 요소가 많다. 그렇다면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어떤 것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을까? 미국 백인 그리스도인들과 저를 비교해 보니 상당히 다른 점들이 있었습니다. 유학시절에 지도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Mr. 임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렇지, Mr. 임?” 미국 사람 특유의 찬사를 여러 학생들 앞에서 하시더군요. 제가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 아는 것 별로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 얼굴이 아주 시커멓게 되었습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시는 거예요. 오히려 제가 당황스럽더군요. 왜 그런가 봤더니, 한국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제가 “그럼요. 제가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라고 했다면, 제가 교수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저의 소통방식은 지극히 한국 문화적인 소통 방식이었습니다. 대화할 때 높은 사람에게는 항상 자신을 낮춰야 하는 문화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문화는 사실 중심으로 자신의 장점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었지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똑같은 상황이 있더라도 문화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한 번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흰옷 입고 머리 길고 지팡이 잡고 있는 산신령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성경이 한글성경으로 들어올 때도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문화적 배경을 함께 갖고 들어 왔습니다. 이처럼 신학적으로 변혁작업을 하지 않으면, 기존에 들어있는 문화가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문화 중에는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신학적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것을 신학적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기층문화에 한국 기독교가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무속적인 성향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국장로교만큼 성격이 복합적인 장로교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전근대적인 요소, 근대적인 요소도 들어왔는데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 요소까지도 다 들어가면서 우리의 신앙이나 삶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않고는 우리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특별히 선교적인 측면이나 예배학적인 모든 측면에서 자칫 잘못하면 정통이라고 하지만 근대주의적인 시대에 그 문화에 맞게 형성된 예전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광식: 모더니즘 시대가 끝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등장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연장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시대로 바뀌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이라고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사상적 특징과 문화적 특징이 결국 우리 신앙과 교회에 영향을 주는데, 제가 볼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상대주의적 시각, 탈 이성적인 경향, 욕망과 의지의 강조, 중앙집권적인 문화에서 대중문화로의 중심 이동, 주변문화의 등장, 형식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예술….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는 신학적 의미, 신앙적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모더니즘은, 이렇든 저렇든, 그것이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절대주의를 주장합니다.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계신다고 보고, 무신론은 신은 절대적으로 없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절대로 계신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든지 말든지’라고 말합니다. 예전엔 역전이나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면 말도 안 되는 것을 전한다고 시비걸고 멱살까지 잡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신을 믿고 나는 내 돈을 믿고, 너는 복음을 떠들어라. 나는 내 길을 간다’ 그러면서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상대주의, 그리고 냉소주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화현상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닙니다. 요즘의 목회가 굉장히 어려운 것은 목회자의 권위를 통해서 통제가 되지 않고 권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색깔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탈권위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포스트모던적 현상입니다.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흘러가면서 신앙의 형태가 달라지고 목회와 교회에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목회 방식을 연구하여 복음 전달을 위한 적절한 방법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봅니다.

 
임성빈: 전 총장님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오늘날 한국 문화의 상황은 소위 문화의 트라일레마trilemma라고 할까요, 포스트모던이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득세했지만 사실 우리의 기본 문화 안에는 전근대성이 여전히 강합니다. 모더니즘도 무늬는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집에 가면 여전히 전근대성이 강하지 않습니까? 학교는 근대성을 무늬로는 얘기하고 사회는 포스트모던적인 문화가 지배합니다. 교회도 어찌 보면 이런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다른 사회보다 전근대성이 여전히 강한, 위계질서가 강한, 교회에 오는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던적인 영향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런 형태이기 때문에 어떤 처방이 문화적인 소통을 위해서도 굉장히 어려운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권위를 다 부셔버리는 포스트모던의 강점은 한편으로는 개혁신학과도 어느 정도 맥이 통한다고 보입니다. 전근대, 근대, 포스트모던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리트머스 테스트가 권위에 대한 생각 아니겠습니까? 포스트모던적인 문화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권위’이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권위주의는 나빠도 권위는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권위가 억압과 조작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 권위를 부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물을 버리다가 갓난아기까지 버리는 격으로 진정한 권위마저 버려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인위적인 권위가 아니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는 훨씬 더 영적인 경건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전 총장님이나 저나 총장이 되고 나니까 훨씬 더 많이 기도해야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예전에 하던 교리 중심적이고 행위 중심적인 것에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삶으로 증거를 해야 하고, 교리중심의 명제적 접근보다는, 그 명제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고 영으로 붙잡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머징 교회라든지 현대 교회들이 나름대로 애쓰는 모습들을 우리가 섣불리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 마음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광식: 포스트모더니스트 장 프랑수아 리요타르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위르겐 하버마스가 논쟁을 벌일 때,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던 입장을 두고 “신보수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던 시대에는 이성적인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사회구조와 삶에서 비합리적인 것을 없애가면서 가능한 합리화를 시키려고 했는데, 포스트모던에서는 이성 자체를 거부하다보니까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든 이상마저 포기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를 합리화시키고 민주화시키고,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인 질서를 구축해야하는데 이것을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포기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개혁성보다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수구적 태도를 취한다는 비판입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와 신세대에 연결시켜 보면, 임 총장님 말씀처럼, 목회자들이나 어른 세대들은 모던적인 스타일이 되어서 굉장히 권위적인데 비해 지금 대학생 세대들은 포스트모던의 스타일이기 때문에 세대 간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세대들은 권위적이고 지시적인 교육을 받아서 자신들도 명령하고 지시를 합니다. 목회도, 예를 들어서, 그런 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님 하던 분들도 그렇게하기 쉽상입니다. 민주적인 교육을 받아 늘 토론하고 대화하고 소통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에겐 이성적인 것이 권위인데 구세대에게는 권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목사님이 말한다고 해서 권위가 아니라 아이가 말해도 맞으면 그게 권위라는 것이, 젊은 세대들의 사고입니다. 이래서 젊은이들이 나이 많은 세대를 뭐라고 하느냐면 ‘저 사람들은 프레임에 갇혀있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어른 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을 볼 때는 ‘우리는 옛 프레임에 갇혀있고 너희는 새로운 프레임에 갇혀있다’고 볼 것입니다.
「역사의 종언」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는 끝났다. 이제 인류에게는 지루한 평화만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영원한 승리다”라고 썼는데,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9.11 사태가 터지면서 큰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자리에 숨어있던 작은 이데올로기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벗겨지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데올로기는 연세 많은 세대에게도 있고 젊은 세대에 있으며, 보수적인 교회에도 있고 진보적인 교회에도 있으며, 개인에게나 공동체에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살아있고 우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가 무엇이 복음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 뜻인지, 어디까지 이데올로기를 종식했는지 식별하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 말씀 외에 무슨 이데올로기나 인간 논리에 빠져서 교회가 복음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데 내가 방조하고 거기에 부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닌지, 이에 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기성세대는 기성세대대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늘 복음 안에서 자기를 반성하고 재개혁하는 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임성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최근 저도 하버마스의 후기세속화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속화론에 따라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얘기하다가 그 전망이 한편으로는 맞지만 결과적으로, 현상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번성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런 현실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개신교 인구가 19.7퍼센트로 우리나라 제1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가톨릭을 합치면 30퍼센트 가까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1/4인 이 나라가 정치·경제·사회면에서 어떠한지도 살펴봐야 하겠지만, 이 수치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책무를 무겁게 느껴야 할 것입니다. 왜 기독교만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고 핑계 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한 복음적 정체성과 우리의 어떤 이념·문화보다 훨씬 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일깨워줌으로써 다시 한 번 신앙인다운 신앙인, 교회다운 교회로 나아가는 기회를 제공한다 생각합니다.

두 분이 나눈 문명에 관한 대화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데 바른 지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 출처:

6a77e6313fe41c12b77125735a8a23cb_1500257040_272.jpg〈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2017년 7/8월호
* 기사: 대담 전광식-임성빈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http://www.ct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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